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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공동체: 김수화, <메타 헨즈>

 

하은빈

공연장에 들어서면, 바닥에는 해안선처럼 굴곡진 선이 그려지고 있다. 안무가이자 퍼포머인 김수화가 VR 헤드셋 ‘메타 오큘러스’를 쓴 채 바닥에 테이핑을 하는 중이다. 관객이 입장하는 동안 그는 현실세계 위에 VR세계의 윤곽을표시하는 데 몰두한다. 아마도 VR 헤드셋 속 세계는 테이프선 안쪽까지만 존재할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게 될 뿐인 가상세계의 끄트머리들. 사실은 얼마든지 더 손을 뻗거나 걸어갈 수 있지만, 그의 시야에서는 사라진다는 점에서 어둠에 잠겨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영역들. 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투사되고 있다. ‘가상의 보호 경계 설정’.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사람들의 기척 속에서 테이핑은 계속되고, 두 세계의 경계선이 천천히 관객의 눈 앞에 떠오른다.

 

 

테이핑이 끝나자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가상공간을 이 자리에 옮겨오기 시작한다. 점 네 개, 네모 하나, 동그라미 하나가 바닥 어딘가에 테이프로 표시되고, 김수화는 문득 어디론가로 걸어가 외친다. “리셋!” 그 시점부터 그 자리가 가상공간의 새로운 정중앙이 된다. 가상공간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사물들의 자리도 바뀐다. 다른 자리에 새로이 그려지는 점 네 개, 네모 하나,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다시 “리셋!”. 또다른 점 네 개, 네모 하나, 동그라미 하나. “리셋!”. 점 네 개, 네모 하나, 동그라미 하나.

 

 

이제부터는 실제의 사물들도 대동된다. 바퀴달린 화분받침 위에 놓인 화분, 허리께까지 오는 높이의 화이트 박스, 둥글고 목이 긴 스탠드 조명이 차례차례 무대 구석에서부터 이끌려 테이프선 안쪽으로 들어온다. 김수화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는 아무래도 화분과 조명이 놓인 실내 공간인 모양이다. 테이프로 표시된 자리에 사물들이 놓인다. “리셋!” 바뀐 가상공간의 좌표가 새로이 표시되고, 그 자리에 각각의 사물이 기입된다. “리셋!” 가상공간의 중심이 점점 치우친다. 화분과 박스와 스탠드 조명이 하나씩 테이프로 설정된 가상공간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리셋과 재배치가 계속된다. 모든 사물들이 테이프선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김수화가 입을 여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는 언젠가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있었던’ 경험을 관객들에게 공유한다. 어느 미술관에서 VR 기기를 쓴 채로 무언가를 수행할 때였다. 문득 바깥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두 세계의 틈새에 애매하게 끼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또다른 전시에서는 바깥에서 김수화를 지켜보던 사람과 거의 ‘한팀’이 되어 얼결에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했던 경험도 있다. 두 경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사람은 김수화가 보고 있는 가상현실을 그와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공연에서 김수화의 관객들이 처한 상황은 전자의 경험에 더 가깝다. 김수화는 VR 헤드셋을 통해 관객이 모르는세계를 홀로 보고 있고, 관객은 그 세계의 유일한 번역자이자 매개자인 김수화를 통해서 그가 속한 공간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이러한 짐작은 비단 관객만의 것은 아니라서, 김수화 역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관객들의 이런저런 소음을 통해, 어쩌다가 옷깃이 스치는 등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관객들의 존재를 예측하며 공연을 전개한다. ‘메타 오큘러스’가 인식할 수 있는 신체의 부위는 오직 그의 손뿐이므로, 허공에 뻗은 손의 형상만이 김수화와 관객이 공동으로 보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김수화가 말하듯 “가상의 정의가 ‘어림짐작하여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김수화와 관객은 서로의 존재를 예상하거나 혹은 빗겨가면서 각자가 속한 공간 너머를 가늠하고 있다.

 

 

‘메타 오큘러스’를 통해 기업 ‘메타’가 제시하는 비전은 “진화된 연결”이라지만, 김수화는 연결되어있는 이의 자유를 누리기보다 두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사람의 엉거주춤함에 가까워 보인다. VR 속 시야는 드러내지 않기를 택함으로써, (손을 제외하고는) VR 기기에 번역되지 않는 몸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관객의 눈 앞에 그대로 노출하면서. 어둠 속을 걷는 사람처럼 김수화의 몸은 단호하면서 동시에 조심스럽다. 매번 결연히 움직이기로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호하고, 벽이나 사물에 부딪치거나 그것들을 찾아 더듬거리는 순간에 불가피하게 주춤거린다는 점에서 조심스럽다.

 

 

그러한 상태로 김수화는 걷고, 뛰고, 이동하고, 사물을 옮기고, 벽을 옮겨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관객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걸으며, 관객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몰라서 허공에 대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수화가 관객에게 호출하고 요청하는 것은 “공동의 경험”이다. “여러분이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뭘 보는지도 모르시겠지만 공동의 경험이라고 생각해보고 있어요. (…) 그런데 어디까지 공동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로 이 공연은 공동의 경험이다. 김수화가 움직임에 따라 관객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적극적으로 김수화의 배경이자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 속에서 ‘한팀’이 되어 움직인다. 김수화가 하려는 바를 수화가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김수화의 가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계속해서 김수화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표한다. 그런데 김수화가 만들고자 하는, 혹은 드러내고자 하는 경험은 궁극적으로 “공동의 경험”, 그러니까 모종의 ‘공동체성’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김수화와 관객들은 역설적인 공존의 상황에 놓인다. 김수화를 일정하게 홀로 두는, 말하자면 공동void 속에 던져두는 것이 관객들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공동void의 공동체. 김수화를 지속적인 홀로됨 속에, 진공 내지는 공동의 상태 속에 던져놓기를 공모하는 공동체. 그가 공동의 경험을 요청하고 발화할수록 더 가장자리로, 김수화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흩어지는 공동체. 김수화를 계속해서 김수화만의 세계에 홀로 남겨두는 방식으로 함께 있는다는 점이 충성스러운 동시에 너무한, 구분할 수 없이 뒤섞여버리는 다정함과 매정함의 공동체. 김수화는 자신이 만든 그 기묘한 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구축해낸 공동 속에서, 너무 오래 기다려온 사람처럼 혹은 이미 그것을 상실해버린 사람처럼 “공동의 경험”을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며 공연한다.

 

 

어느 시점 이후로 김수화의 목소리는 녹음된 음성 파일로 대체되고, 그것을 AI가 받아적은 결과물이 벽에 투사되어 관객에게 보여진다. “만약 나중에 (…) 우리는 듣기와 말하기를 생략하고 체화의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요?(…) 그날이 오면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모여 침묵 속에서 10분의 명상으로 끝! 합창단은 생각의 종류와 속도를 연습하고, 우리는 주파수를 잘 맞추면 어디서나 공연을 감각할 수 있고, 저는 고래와 작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마치 타인의 말들인 양 김수화의 곁을 지나치고, 곧이어 벽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어디선가 아득한 고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안, 그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프로젝션의 불빛을 쬐며 느리고 천천한 춤을 춘다. 경추척수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경추 5번과 6번 사이에 심겼다는 유리 세라믹과 금속 보철물을 마찰시키고 진동시키는 움직임이다.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수화는 미미하게 회전하며 미약한 진동을 한동안 침묵 속에서 연습한다. 누구에게도 수신되지 않을 주파수의 언어를 발신한다는 점에서 외로이, 그러나 길고 진지하고 오랜 연습이라는 점에서는 희망적으로, 그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관객공동체를 향해서.

 

 

나는 김수화가 그런 말들을, 그러니까 기술에 대한 긍정과 낙관을 전부 믿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김수화를 바라본다. 오히려 그런 기술을 경유해서라도 만나고 말을 건네고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 관해 궁금해하고 이끌린다. 기술의 발달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집요하게 남는 ‘함께’의 전제를 들여다보고 상상한다. 침묵 속에서 10분의 명상’만 하고 헤어질지라도 일단 ‘모이는’ 배우와 관객을. 생각의 종류와 속도를 ‘함께’ 연습하는 합창단을. 고래’와’ 작업하려고 자신의 진동을 연습하는 김수화를. 아무리 몸 없이 가능한 일들이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일단 모이는 일만큼은 기어코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이 행위자들을.

 

 

공연이 끝난 후, 김수화는 조심스럽게 ‘메타 오큘러스’를 벗는다. 헤드셋의 압력에 눌린 자국 때문인지, 공연을 막 마친 사람 특유의 취약성 때문인지 그의 눈가는 막 태어난 사람처럼 붉다. 아주 긴 터널을 지나 갑자기 햇빛을 보는 것처럼 무르고 약한 눈이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박수를 친다. 따라 박수를 치며, 이전에 김수화에게 했던 질문을 생각한다. “이 공연에서 절대 놓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믿음이 무엇이에요?” 김수화는 오래 고민한 후 이렇게 답했었다. “… 밖에 관객들이 있다는 것이요.” 이제 그토록 절박하게 믿었던 관객의 존재를, 자신이 만든 관객 공동체를 처음으로 맞닥뜨린 김수화는 기쁘다기보다도 얼떨떨해 보인다.

 

 

막 공연이 끝난 수화에게 어떤 관객들이 냉큼 달려가는 것을 본다. 여기서, 실은 공연의 어느 순간에 근사한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하고 싶다. 기업 ‘메타’가 말하는 “진화된 연결”에는 몸이 없다는 사실을 김수화가 지적하던 시점의 일이다. 다섯 명의 여성이 태연자약하게 김수화가 들어가있는 벽에 기대어 벽 밖으로 수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김수화가 벽 뒤에서 그 벽을 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멀뚱멀뚱 앉아있는 바람에 수화가 아무리 밀어도 벽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갖은 용을 쓴 끝에 마침내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제가 좀 나갈게요…”

 

 

화들짝 놀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가 벽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것을 허둥지둥 돕는다. 그제야 그들이 일찍이 이동했어야 했음을 깨닫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건너편으로 뛰어간다. 마침내 벽 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된 수화가 이를 앙다물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이 어디 계신진 모르겠지만… 우리 공동체가 된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수화에게 다가간 것은 조금 전 수화를 곤경에 빠뜨렸던 바로 그 예의 관객들이다. 조금 전에 온몸으로 김수화를 실패시켰던 바로 그 관객들이 그에게 덥석 꽃다발을 안기는 광경이, 김수화를 난처하게 한 이들이 또한 이토록 열렬히 김수화를 환대한다는 사실이 아찔하게 아름다워 몸이 조금 떨린다.

 

 

때로 공연은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를 조금 허물어 의도와는 조금 다른 것을, 그러나 공연자가 보이고자 했던 바로 그 사건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가 조심스럽게 지어놓은 고유한 세계를 무참하게 부수면서 그에게 온다는 것을. 그런 충돌과 박살남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어떤 공동체가, 사랑이, 대체불가능성이 태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 다정함과 매정함을. 어떤 이들은 어쩌면 그토록 모질고 지극한 순간을 목격하고자 관객이 되고, 그중 어떤 이들은 급기야 공연자가 된다.

하은빈 |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며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불구의 몸, 상한 마음, 잘못한 사람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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