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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라는 명상
하라은(나은)

진실은 머뭇거림, 줄임표, 횡설수설, 침묵, 틈, 사이(pause)의 형태로 우리 주위를 유영하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욕망하면서도 이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진실이 조금 더 확실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 주길 바란다. 사람들은 확언이나 단언을 신뢰한다. 우리의 에고가 불확실성을 두렵게 여기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우리의 감각을 경직되게 하고, 여유를 앗아간다. 사기꾼은 이 감정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자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도파(道破)하며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든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확실합니다. 저 새끼가 잘못했네요. 저자를 죽입시다. 더 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말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반대로 진실은 오해를 수반한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대화가 통하는 이를 간절하게 찾아 헤맨다. 대부분의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면서. 대화가 통하는 이와의 결속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주의 구성물로서 이미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대화는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자연현상에 가깝다. 오해나 오독, 불화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이를 인위적인 재해로 간주할 뿐이다.

지금 나는 자주 가는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김수화의 공연 〈애프터바디(Afterbody)〉에 부치는 에세이를 퇴고하고 있다. 이 카페에는 커다란 통유리 창이 있다. 창 너머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이곳에 올 때마다, 풍경들이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풍경에서 발견한 메시지들을 나에게 익숙한 언어로 변환해 본다. 비가 내린다. 바람이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분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지나간다. 아이는 파란 스웨터를 입고 있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힌다. 가로수에서 나뭇잎이 떨어진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카페 앞에 주차된 자동차 아래로 들어간다. rain, raincoat, cat, child, sweater… 나는 내가 이들의 언어를 결코 명확하게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트북 화면 위에 구름처럼 걸린 글자들을 본다. 글자, 정확히는 글자가 지시하는 개념들은 나를 가끔 실의에 빠지게 한다. 나는 종종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의구심을 느낀다. 충분한가? 적절한가? 유효한가? 우리는 가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실,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섣불리 언어화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서, 편지, 대화에 마침표를 찍어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규약이니까. 지금 마감을 앞둔 나의 처지 또한 그렇다. 나는 이 글의 발신자이자 타이피스트다. 수신자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우리 사이에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는 누구인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위치를 고수할 때 우리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다. 그 강박은 우리가 선별된 정보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배제하도록 만든다. 메시지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압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잘려 나간 불완전한 정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주로 만나는 정보는 의도가 포함된 메시지다. 그렇지만 미디어는 중립적인 매개체로 발신자와 수신자 없이도 이미 자연에 존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의도를 전달하는 목적 없이, 미디어의 맨몸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수신자나 발신자의 에고를 서서히 내려놓게 된다면? 내게 〈애프터바디(Afterbody)〉는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로비 한쪽에 김수화의 핸드메이드 기계가 설치돼 있다. 이것은 와이파이 신호 세기의 변화를 감지해 변화값에 따라 SD카드에 저장된 음성을 출력하는 장치다. 와이파이 신호량은 무대의 물리적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관객의 수, 퍼포머의 움직임, 주변 소음의 정도 등) 정확히 어떤 조건이 얼마만큼의 변화를 끌어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퍼포머 김수화는 무대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동작을 반복한다. 걷고, 몸을 구부리고, 앉고, 줄넘기도 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신호의 변화를 감지한 장치에서 소리가 나온다. “혼자 있어요?” “뭐 하고 있어요?” “이동하세요” “제가 보이나요” “APPLE” “WATER” 김수화가 대답하며 움직인다. 장치는 다시 소리를 낸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들이 오간다. 의미는 미끄러지지만, 소리는 점차 하나의 ‘대화’처럼 모이기 시작한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인데, 나는 훌륭한 발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먼저 뛰어난 수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연을 보기 전 김수화의 작업을 다룬 텍스트를 열심히 읽었다. 김수화 본인이 쓴 글도 읽었고, 과거 전시의 서문, 매체에 실린 기사도 읽었다. 김수화의 작업을 ‘오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명징한 표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와이파이 등의 기술을 매개로 다원 예술 작업을 해오는 무용수’ 등의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와이파이, 다원 예술 따위의 어휘에 성실하게 밑줄을 그었다. 공연을 끝까지 보고 깨달았다. 공연을 오독하지 않으려는 관람자의 노력이 오히려 온전한 감상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처음에 나는 기계 장치가 대화의 발신자라고 믿고, 그를 인공지능의 목소리 정도로 오인했다. 장치는 때로 (김수화로 추정되는 대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고, 김수화는 그 질문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연의 대화를 곱씹으며 알게 되었다. 이 작업에서 수신자와 발신자를 구분 짓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원공간 로비에 생태계를 구축한 사람, 센서를 설치한 사람, 장치에 소리를 입력한 사람, 센서의 반응을 유도하는 사람 모두 분리된 주체로 볼 수 없었다.

 

〈애프터바디(Afterbody)〉에는 여러 대화가 중첩돼 있지만, 이 대화에서 수신자나 발신자의 존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용수의 몸이, 자연에 내재한 대화를 길어 올리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들이 떠오른다.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형상이 대리석 덩어리 안에 이미 들어있고, 조각가는 그것을 단지 꺼내는 자라고 믿던 이들. 어쩌면 이건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상태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창작자가 자아를 팽창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가운데, 김수화는 본인의 신체를 그저 하나의 매질(媒質)로 다룬다. 김수화는 최선을 다해 움직이며, 신체를 지운다. 그는 기대할 수 없는 대상에게 말을 걸고, 예측하지 못한 상대의 질문에 답한다.

 

김수화는 관망(觀望)하는 몸으로 존재한다. 센서 장치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더라도, 그는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수용한다. 김수화의 작업은 변수로 가득하다. 변수는 생태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공연의 센서는 일정한 움직임을 감지하여 미리 녹음된 소리를 출력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김수화 본인도 센서의 반응을 예측하지 못한다. 공연 당일의 물리적 환경이 센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퍼포머 김수화는 분주히 걷고, 뛰고, 움직인다. 한편 그는 그 공간의 누구보다도 고요하다. 그는 기우제를 주관하던 선사시대의 제사장을 닮았다.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계에서는 철새를 모티브로 작성된 시가 흘러나온다. “철새는 눈으로 자기장을 읽고 가야 할 방향을 찾는다. 인간은 길을 잃을 자유를 상실했다. 그래서 나의 발은 종종 길을 잃기 위해 떠돌기를 연습한다. 반드시 어디론가 향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내 발에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TTS(Text To Speech) 음성으로 구현된 이 문장은 물리적으로는 발화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전기 신호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며 관객들에게 닿는다. 나는 이 시가 김수화의 작업 세계를 함축한다고 느꼈다.

 

많은 작가(발신자)가 독자(수신자)의 오독을 두려워한다. 오독은 우리가 자연의 변인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독은 산들바람, 이동하는 철새, 설원에 찍힌 발자국과도 같다. 쉽지 않겠지만, 작가로서 오독을 관망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비가 그친 것 같다. 유리문 밖 고양이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커피는 철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트북 화면에는 〈애프터바디〉에 관한 에세이 파일이 계속 띄워져 있다. 연약하고도 억센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카운터로 향하고 커피를 추가 주문한다. 영업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기로 한다.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반복한다. 눈을 뜨고 화면을 응시한다. 글자들이 호흡한다.

하라은(나은)

2024년 12월 더줌아트센터 연극 〈신의 바늘〉 프로젝트 매니저 · 접근성 매니저

2024년 5월 국립아시문화전당 아동청소년극 〈슈레야를 찾아서〉 드라마터그

2024년 3월 연희예술극장 연극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 홍보

2024년 1월 스페이스 ink 영안 & 주보람 2인전 〈One Before Zero〉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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