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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난관을 낙관하시오

하라은
그날도 나는 현실에서 스크린으로 대책 없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강원도 여행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 국도를 타고 산을 통과하던 기억이 난다. 커다란 나무와 암석, 수풀이 가득한 산등성이를 지나다 차창 밖으로 하얀 집을 목격했다. 지붕부터 외벽, 창문과 대문까지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전원주택이었다. 순간 그 집이 유년 시절 비디오 게임 화면에서 보던 픽셀 이미지 같다고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현실을 참조하여 그림을 그렸을 텐데, 나는 도리어 현실의 건축물을 보고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열고 ITS 국가교통정보센터(National Transport Information Center)에 접속하여 실시간 위치 변화를 관찰했다. 나는 빨간 승용차에 탑승 중이었는데, 화면에서 내가 탄 차를 금방 식별할 수 있었다. 픽셀만큼 작은 빨간 도형이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일행과 나는 분명히 그 안에서 호흡하고 있었지만, 화면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가정을 해보았다. 이 화면 역시 누군가가 설계한 게임의 일부라면? ‘우리’가 비트맵 이미지를 구성하는 도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종종 현실을 전자기기 스크린처럼 인식한다. 이는 나의 일상에 유·무형의 지장을 가져다준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산수와 풍광에 ‘재접속’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접속 행위에는 언제나 버퍼링이라는 고난이 뒤따른다. 서버 오류로 화면이 다운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인지 체계와 감각이 모조리 흔들리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PC와 전자기기가 우리의 인식을 확장해 주고 활동 범위와 지평을 넓혀 준다고 배우며 자랐다. 이는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스크린을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이미지들을 보며, 나는 내가 이름 모를 게임에 갇혔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상은 곧 기이함, 스산함, 두려움 등의 구체적 감정으로 확장되었다. 출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현대 예술은 플레이어에 불과한 개인에게 게임의 설계자가 될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과 게임의 공통점은 난관을 창조할수록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퍼포머이자 안무가인 김수화의 전시 소감을 남겨보려고 한다. 김수화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 사이사이에 수많은 난관과 방해물을 설치하기 때문이다. 김수화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접속하던’ 모든 이미지와 소리들이 어긋나고, 끊어지며, 파열한다. 김수화는 퍼포머이기 때문에 분명 ‘플레이어’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김수화는 자신이 설계한 난관들을 직접 통과한다는 점에서 베타 테스터이기도 하다.
 
김수화 개인전 〈우리는 거기서 만난다(We meet there)〉이 열린 북촌전시실 앞에서 나는 다시 재접속 상태에 놓였다. 전시장 외벽에 어둡고 푸른 배경의 포스터 한 장만이 크게 걸려 있었는데 나는 뜬금없게도 그 이미지가 불법 게임 사이트의 로그인 화면 같다고 여겼다. 정식 회원이 되기 전까지 게임에 관해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 수상한 사이트 말이다. 이 전시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join) 어두운 방으로 입장했다. (enter) 작은 방 안에서 여섯 개의 스크린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여섯 개의 섬네일이 켜져 있었다.) 〈P〉 ,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 〈우리는 거기서 만난다(Connecting practice: We meet There)〉, 〈행운의 편지(Letter of Luck)〉, 〈예측할 수 없는 이동(Moving unpredicted)〉, 〈Into the White〉... 나는 김수화가 설계한 규칙에 기꺼이 포획되기로 했다.
 
 
난관의 설계자, 낙관의 플레이어
 
개인전 제목의 원형이 된 〈연결 연습: 우리는 거기서 만난다(Connecting Practice: We Meet There)〉(2024) 는 10분 56초짜리 영상 작업이다. 김수화는 와이파이 신호 ‘Android 9707’을 감지하는 센서에 ‘우리, 는, 거기, 거기서, 만난, 만난다’ 등의 단어 또는 형태소를 세기에 따라 다르게 저장한다. 그는 해당 센서를 자문밖아트레지던시 팔각정 외부 정원에 설치한 다음 프로그래밍된 음성을 현실 공간으로 불러오는 소환술 게임을 시도한다. 플레이어는 무용수 김수화, 이소여, 허성욱이다. 이들은 센서 앞에서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와이파이 주파수를 바뀌고, 저장된 소리들이 출력된다.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는 “우리는 거기서 만난다.”가 비교적 발화하기 쉬운 문장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 말을 빠르게 뱉거나 타이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자기파 인식으로 ‘우리는 거기서 만난다’라는 문장을 불러오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조건부로 출력되는 분절된 음성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팔, 다리, 허리, 목 등을 움직여가며 형태소와 음절들을 조합하기 위해 애를 쓴다. 형태소는 플레이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붕괴하며 미끄러진다. 이들은 해가 떠 있을 때부터 만나 움직이지만, 시간은 대책 없이 흐르고, 어느덧 밤이 된다. 이들은 정말로 문장을 만들고 싶은 걸까? 어쩌면 김수화는 처음부터 ‘완결되지 않을’ 게임을 설계한 것일지도 모른다.
 
〈P〉(2022)는 퍼포머 김수화가 VR 헤드셋이 제공하는 신체 경험을 기록한 12분 9초짜리 영상 작업이다. 플레이어 김수화는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오스트리아의 시내 이곳저곳을 경쾌한 걸음으로 옮겨 다닌다. 그는 상점을 지나치고, 길을 걷고, 강변에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굴다리를 통과하며 춤을 춘다. 영상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만이 나오지만, 그가 VR 헤드셋을 착용한 덕분에 모든 장소가 게임 배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VR 헤드셋은 착용자뿐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시각 경험’을 남기는 장치다. 우리는 VR 헤드셋을 쓴 사람을 보면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의 앞에 보이는 풍경을 추측한다. 그의 앞에 얼마나 근사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비록 그가 좁은 방 안에 누워 있더라도, 그의 앞에는 평원이나 들판, 협곡이나 얼음 빙하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P〉의 플레이어 역시 즐겁게 VR 게임에 매진하는 상태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반전이 있다. 플레이어는 사실 VR 헤드셋의 전원을 끈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 그는 사실상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아주 약간의 빛에 의존하여 시야의 대부분을 가린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이는 설계자 김수화가 플레이어 김수화를 위해 설계해 둔 난관이다.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는 경기도 김포시에서 서울특별시 가양대교까지의 드라이브를 일인칭 운전자 시점으로 기록하고, 드라이브 내내 AM 라디오(중파 방송) 주파수를 듣는 장면을 보여주는 21분 2초짜리 영상 작업이다. 설계자 김수화는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에서 ‘AM 라디오의 주파수 소리로 차 내부를 채워야’ 한다는 조건을 입력한다. AM 라디오 특성상 소리는 잘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지직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이다. 그 소리는 외계인의 교신 같기도 하고, 미국의 광활한 옥수수밭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이따금 음악 소리나 뉴스 해설자의 목소리가 기적적으로 잡히지만 음질이 깨끗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플레이어 김수화는 FM 라디오를 철저히 배제하고 AM 라디오만을 들으며 운전을 시도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소리를 대체로 선별하여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겐 스마트폰과 MP3가 있으니까. 라디오 청취는 너무나 쉬운 행위로 여겨진다. 클래식이 듣고 싶으면 클래식 채널을, 국악이 듣고 싶으면 국악 채널을 들으면 되니까. 김수화는 쉬운 길을 거부하고 외계의 교신 같은 AM 주파수로 오디오를 가득 채운다. 소음에 취약한 운전자라면 이 주파수를 장애물처럼 여기겠지만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선별되고 정돈된 소리를 청취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는 소음처럼 감지되는 주파수를 가만히 청취하기만 한다.
 
김수화는 모든 풍경과 물체를 우회 접속으로 목격하라고 지시한다. 우회 접속이 별다른 흥미로운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김수화의 설계는 우회 접속 자체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난관으로 설계하고, 낙관으로 플레이한다. 그는 ‘beginner’ 모드를 끄고, 기꺼이 ‘expert’ 모드를 선택한 다음, 버그까지 추가한다. 쉬운 선택 거부하기. 아는 경로 돌아가기. 나는 이것이 김수화가 게임에 참여하는 태도라고 느꼈다.
 
 
스크린 너머로 흘러내리는 인간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를 앉은 자리에서 3번 연속으로 관람하던 중 나는 서서히 현실 감각을 잃었다. 어느 순간 자동차 유리 바깥으로 보이는 길이 게임 배경으로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핸들을 틀어 자동차를 길 바깥(국도 바깥)으로 밀어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국도 바깥의 화면 설계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게임 속 3D 버그처럼 허공에 자동차가 둥둥 떠 있을까? 여기서 자동차를 밀 방법이 있을까? 잠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예측할 수 없는 이동(Moving unpredicted)〉은 안무가이자 퍼포머인 김수화가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의 한 작업실에 센서를 부착해 두고, 와이파이 신호의 세기(strength)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가 재생되는 과정을 기록한 9분 18초짜리 영상 작업이다. 김수화는 센서 안에 시적(poetic) 문장들을 삽입한다. 이 문장들은 하나의 의미망으로 모이지 못하고, 출현과 끊김을 반복한다. 목소리들이 어떠한 언어의 그물도 형성하지 못하고 끊기는 동안, 화면에는 김수화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한 창문 바깥 풍경이 무작위로 나열된다. 화면에는 평범한 도시의 풍경이 인과 없이 나타난다. 산, 아파트, 건물, 건물 옥상, 간판, 도로, 자동차, 전신주.
 
이 장소들은 실재한다. 동시에 이 장소들은 게임의 정지(pause) 화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이 모든 풍경을 하나하나의 대체 가능한 ‘오브제(object)’로 느끼기 시작한다. 화면 옆 스피커에서는 이러한 소리가 무작위로 울려 퍼진다. “예측할 수 없는 이동. 이해할 수 없는 사라짐. 인간의 언어를 안다면. 사라진 사람들. 그것들의 죽음.”
 
〈P〉의 플레이어는 자신이 살아서(live)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화면 속 캐릭터 같다. 그는 게임 세계의 돌연변이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조약돌을 만지고, 감각하며, 그것을 관객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늘어뜨린다. ‘I still have five fingers’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오일 파스타를 천천히 씹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데 기어이 실패한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마치 게임 속 조건에 의해 나열된 그래픽 오브젝트처럼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스타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방의 도구들이 노출된다. 밥솥, 냄비, 프라이팬, 컵, 칼, 싱크대, 세제, 올리브유. 나는 그것들을 게임의 픽셀 배경처럼 여기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그를 구출하지 않기로 한다.
 
 
튜토리얼 - 불운의 편지
 
이 게임의 튜토리얼이라 할 수 있는 〈행운의 편지(Letter of Luck)〉(2023) 이야기를 해보자. 〈행운의 편지(Letter of Luck)〉는 김수화가 서울에서 독일 함부르크에 가는 비행기 안, 그리고 함부르크를 오가며 촬영한 영상을 담은 13분 6초짜리 작업이다. 김수화는 영상 위에 ‘행운의 편지’를 모티브로 한 자막을 입힌다. 김수화는 이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한다. 김수화는 와이파이 신호에 기대 유튜브에서 이 영상을 재생하게 될 누군가를 수신자로 상정한다. 수신자는 ‘행운의 편지’를 읽고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행운의 편지’의 핵심은 규칙이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n일 내에 이 편지를 n명에게 보내야 한다고’ 한다는 규칙. 편지를 보내지 않을 경우 불운이 찾아올 수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편지를 받고 그냥 버렸는데, 일주일 후… ‘행운의 편지’는 사실상 불운의 편지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러한 불운에 가담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였다. 짝꿍이 내 이메일로 ‘행운의 편지’를 보냈고, 나는 다음날 영어 학원 친구에게 편지를 그대로 전달했다. 영어 학원 친구는 태권도 학원 친구에게 그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편지는 나에게로 돌아왔다. 중간에 몇 명이 그 편지를 받았는지는 잘 모른다. 확실한 건 내가 불운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썼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 납득되지 않는 사회적 관습과 맥락들. 나는 내가 여전히 그러한 편지에 시달리고 있다고 느낀다.
 
김수화는 ‘행운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돌리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대신 그는 게임의 규칙을 능동적으로 고안한다. 비록 그 규칙이 기존의 관성과 대치되는, 쉬운 길을 어렵게 우회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규칙을 시행한다는 건 (움직인다는 건) 살아있다는 이야기고, 규칙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건 (멈춘다는 건)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규칙에 참여하는 도중에는, 우리는 기쁨이나 슬픔, 행운이나 불운을 느끼게 된다. (게임을 하던 중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온 적이 있는가? 캐릭터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뭔가를 수행하며 쾌락을 얻을까? 수행은 그 자체로 기쁨을 준다. 비록 그 수행이 일정한 불편감을 수반하더라도. 〈행운의 편지(Letter of Luck)〉를 통해, 김수화는 은밀히 속삭인다. 이 게임 같은 현실을 뒤로 하고, 기꺼이 난관에 동참해 보자고.
 
 
교란되는 시공간
 
김수화는 실내에 모니터와 태블릿 등의 장치를 배치하고, 실내 위쪽 공간에는 빔 프로젝터로 〈Into the White〉(2022)를 영사한다. 〈Into the White〉는 4분 50초짜리 움직임 영상 작업이다. 김수화는 명도를 최대한으로 올린 하얀색 공간 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물체나 의상을 떨어뜨리며 장소의 중력을 기록한다. 하얗고 밝은 미장센 안에서 어떤 피사체는 선명히 드러나지만, 어떤 피사체는 현저히 왜곡된다. 〈Into the White〉의 도입부에는 퍼포머의 눈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나온다. 이 ‘눈’은 북촌전시실에 설치된 나머지 다섯 개의 영상 작업과, 이 영상 작업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을 전지적으로 관망한다.
 
전시 둘째 날, 나는 어둡고 좁은 북촌전시실 실내 바닥에 앉아 〈P〉를 감상하며, 화면 속 퍼포머가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순간 왼쪽 시야로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 화면이 들어왔다. 굴다리를 통과하는 자동차, 밤의 도로, 한강의 밤물결이 보였다.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모니터 앞에서는 다른 관람객이 아침 강변의 윤슬을 촬영한 장면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하나의 공간에서, 밤과 낮이 은밀하게 눈치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전시장 문을 나서기 전, 나 이외의 다른 게이머들을 염탐했다. 〈주파수 샤워(Frequency Shower)〉를 감상하는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옆모습과, 〈예측할 수 없는 이동(Moving Unpredicted)〉을 감상하는 남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순간 나와 그들 모두가 스크린 속에서 자맥질하는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나는, 너는 실재하는 사람들일까? 고개를 들어 〈Into the White〉가 나오는 화면을 보았다. 커다란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서버의 주시자로 보였다.
 
개인전 관람을 마치고 북촌 언덕을 내려갔다.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았다. 주스를 마시는 경찰들과,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어린이들을 보았다. 순간 그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맥락과 기억을 가진 개별 존재들임에도) NPC 같다고 느꼈다. 잠깐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유년 시절 비디오 게임에서 본 픽셀 구름을 떠올렸다. 구름이 게임을 복제한 것인지, 게임이 구름을 복제한 것인지 도통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는 이러한 난관 속에서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결말은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이 글은 행운의 리뷰입니다. 이 리뷰를 본 당신은 즉시 거리로 나가 게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과 구름, 도로와 자동차, 가로수와 간판을 쳐다보세요. 가장 마음에 드는 물체를 골라, 우회 접속을 시도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하라은

2024년 12월 더줌아트센터 연극 〈신의 바늘〉 프로젝트 매니저 · 접근성 매니저

2024년 5월 국립아시문화전당 아동청소년극 〈슈레야를 찾아서〉 드라마터그

2024년 3월 연희예술극장 연극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 홍보

2024년 1월 스페이스 ink 영안 & 주보람 2인전 〈One Before Zero〉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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